인간극장=에너지 만세맨 정정중 (카페 비니:경기도 구리시 아차울길)
인간극장=에너지 만세맨 정정중 (카페 비니:경기도 구리시 아차울길)
  • 이대로
  • 승인 2023.02.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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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을 통한 사회 환원에 앞장서는 구리농수산물시장 중도매인, 웃음 에너지, 만세맨 - 정정중
카페 비니 베이커리 정정중 대표
카페 비니 베이커리 정정중 대표
인간극장=에너지 만세맨 정정중 (카페 비니:경기도 구리시 아차울길)

이웃과 함께하며 시너지를 발휘해요.” 함께 이루는 좋은 성공, 나눔을 통한 사회 환원에 앞장서는 구리농수산물시장 중도매인, 웃음 에너지, 만세맨 - 정정중

성장 과정

정정중(이하 정중)은 강원도 홍천 산골 서석면 검산리에서 31녀 막내로 1972년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생겨 접근성이 좋았지만, 당시에는 홍천군에서도 알아주는 산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시골 마을에서 유일한 농고 출신 엘리트였는데 직접 농사짓기보단 산골 농부들에게 쌀, 배추, , 산나물 등을 사들여 도시에 파는 농산물 유통 일을 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작은 트럭을 가지고 있어 유통업과 함께 서석면의 작은 응급 차량이 되어 봉사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오지 마을 방문 중 아픈 분이 있으면 홍천 시내 병원으로 모시기도 했고, 외롭고 힘없는 산골 어르신들에겐 쌀과 먹을 것들을 무료로 가져다주곤 했습니다. 지금도 홍천군 서석면 사람들은 작고하신 정중의 아버지 정성호(鄭成浩) 성함을 기억하며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정중은 어릴 때부터 식성이 남 달았습니다. 한 번에 계란 30개를 먹고 눈이 커서 귀여움을 받던 막내 정중을 아버지는 장삿길에 자주 동행시켰습니다.

한번 장삿길에 오르면 2-3일 걸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 힘든 여정이었지만 정중이는 서울 경동시장에서 아침 국밥, 알사탕 사 먹는 맛에 잘 따라다녔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선각자적이었던 아버지는 아이 교육은 서울에서 시켜야 한다고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정중능 고2 때 서울로 유학을 보냅니다.

경동고를 다니며 청량리 작은집 금은방에서 저녁엔 일하고 가게 바닥에서 자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니 공부는 뒷전이었습니다. 지금도 자기가 공부 꼴찌 했다고 무슨 훈장처럼 고등학교 성적표를 복사해 지갑의 가족사진 옆에 넣고 다니며 자랑합니다.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정중이가 공부 대신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만화책만을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꼴찌였어도 지금의 삶이 당당하다는 것은, 그때 읽었던 만화도 큰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어린 시절

산골의 덜커덩거리는 트럭 속에서 아빠가 마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보고 자란 정중이가 청소년기에는 금은방 종업원 생활을 하면서 또 다른 거래기술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입대와 첫 사업?

지긋지긋한 금은방의 종업원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홍천 부모님과 당시 금방 주인인 작은 아버지에겐 한마디 말도 없이 군에 입대합니다.

평생 업으로 이어지는 운전병으로 근무했습니다. 지금도 보면 운전왕입니다키가 크고 쌀가마를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괴력으로 군차량 수리 때 무거운 것은 혼자 도맡아 나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모범 사병이었던 정중이가 군기 교육대를 무려 11번 다녀왔습니다. 한번은 전우가 부품 잃은 것을 자기가 했다고 자기는 덩치도 크고 힘도 좋으니 군기교육대 얼차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전우 대신 자신이 군기교육대에 갔습니다.

또 한번은 작전지역 야전 식사 배달 중에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응급환자가 발생하자 응급환자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환자를 병원으로 급하게 데려다주고 오는 바람에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군기교육대를 다녀왔을 정도로 정중은 정이 많은 사람이고 주변에 어려운 일을 보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구리시에서 하는 독거노인 연탄배달, 김장 봉사 등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십 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제대 후 형제들과 감자경작 유통사업을 합니다.

강원도 출신이라 감자가 사업 아이템으로 제격이었습니다. 전국을 돌며 감자 경작지를 선정, 감자를 키우고 다듬어 유통합니다.

나름 전국에서 감자로는 알아줄 정도로 사업은 잘됐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감자 사업은 무리한 확장으로 망합니다. 아주 크게 망하고 수 억원의 빚도 지게 됩니다.

결혼과 빚 청산

아내는 서울의 유명 공대를 3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탄탄한 중견 전기 관련 업체에서 과장으로 근무 중 정중의 훤칠한 외모와 넓은 마음에 감동하여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결혼하고 보니 부인은 무슨 전생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는가?’ 생각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을 알게 됩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건강하던 정중이 위암 판정을 받게 됩니다. 감자사업을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고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제때 먹지도 못하고 굶기를 밥 먹듯이 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새 신부에게는 회사 부도, 보증청산, 암 판정 등 달콤한 신혼생활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위 절제 수술 후 철저한 식단 관리와 꾸준한 등산 등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고교 시절 금은방 아르바이트부터 지금까지도 새벽 1시 퇴근, 아침 5시 출근하고 있는 정중이가 평생 유일하게 쉰 15개월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가 놀고 있는 후배가 안타까운지 아주대학교 병원에 식재료로 파 납품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평생 부지런함이 몸에 밴 정중이가 마다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인에게 다 낡은 1톤 트럭 한 대 빌립니다. 다시 맞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정중이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겨울에 구리 농수산물 시장에서 수원까지 대파 2kg을 배달한 적도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기름값도 안 나오는 주문이었지만 정중은 고마운 마음으로 배달을 했습니다. 점차 신뢰를 얻은 정중이는 병원 전체 식자재를 납품하게 됩니다.

제대로 된 사업의 앞날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정중이 대신 가장으로 책임지며 회사도 다니고 퇴근하고는 식자재 배송관리를 도와주던 아내는 더 이상 회사와 남편의 사업을 병행하기가 힘들어 첫 아이를 출산과 함께 본격적으로 남편의 사업에 뛰어듭니다. 그 후 아내는 아침 8시 출근하여 새벽 1시 퇴근하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어린 두 딸을 키우면서 지금도 아내는 남편의 사업을 도우면서 남편 정중의 가장 큰 후원자입니다. 그 덕분에 감자 사업으로 빚졌던 모든 채무를 다 갚고 지금은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정중의 착한 마음은 어머니로부터

어머니는(1941년생) 횡성군 청일면 출신으로 한국전쟁과 깡촌 시골 살림에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정중 아버지와 결혼했지만, 어려운 신혼살림에 수저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사글셋 방 한 칸이었지만 사람 좋은 정중의 아버지는 친구들을 데려오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집 주인댁에 숟가락을 빌리러 다닐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리고 방 한 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중 어머니의 부지런함으로 집안 살림이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름 짜기, 누에고치, 소 키우기, 감자 농사, 배추 농사 등 갖가지 일을 하면서, 먹고 살기 힘든 시절, 두 시동생(작은아버지)을 학교와 장가도 보내고, 자녀들도 키웠습니다.

정중이 어머니가 배추 및 감자 농사를 지으시던 시절, 정중이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정중의 두 형들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중이 어머니는 9~10살 될 정중을 새벽 4시에 깨워, 정중의 집에서 지금은 마리 소리골 악기 박물관이 있는 밭까지, 왕복 12킬로 거리의 밭에 함께 다니시곤 했습니다.

어머니 혼자,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길을 다니시기 힘드셨던 까닭이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 밭에 닭 똥거름 몇 차씩 갖다 부어, 밭을 비옥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덕분에 어머니가 농사지으신 감자며 무, 배추의 품질은 최상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중의 타고난 체력, 부지런함, 정성스러운 태도는 그때 몸에 밴 것 같습니다.

정중 부모님은 마을의 기념일에 돼지를 잡아 동네잔치도 하고, 정월 대보름 때는 만두를 빚어 동네 어른들을 대접했습니다. 동네잔치가 정중 부모님에게도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정중의 아버지는 3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아버지의 안부를 묻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작고하셨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도 있고, 배고프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정중 부모님께서 따끈따끈한 밥을 대접했다고, 그 보답으로 산삼을 캐다 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정중이가 사업을 하면서도 구리시 독거노인이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연탄 봉사, 김장 봉사 등 정중이도 넉넉하지 않지만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어릴 때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봉사와 나눔의 마음을 간직하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머니 김종득(金鐘得) 여사님은 1941년생으로 올해 83세이시며, 홍천군 서석면에서 여전히 건강하게 농산물 가게를 하고 계십니다.

어머니 세대의 많은 분이 전쟁으로 인해 공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셔서, 정중 어머니는 늘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으셨습니다. 시골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정중의 누나는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집안 곳곳에 한자를 붙여 놓았고, 정중 어머니는 그것을 바탕으로 한자를 익히시게 되었습니다. 정중 어머니는 60이 넘으신 후, 서울로 서예학원에 다니셨고, 서예학원 다닐 때는 정중 아버지가 늘 모시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 정중 어머니는, 서예 공모전에서 수상도 하셨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애국가로 우리나라 지도를 매일 한 장씩 그리셔서,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한자로 쓴 애국가 지도를 나눠드리기도 하셨습니다.

요즘의 근황은?

만세맨과 사설을 읽어주는 남자, 정중은 지금도 대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생이 수십 개의 카트를 옮기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고 차에서 내리밀어주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길을 물으면 가던 길을 멈추고 목적지까지 안내해 주기도 합니다. 살아가는 목적이 돈 버는 일보다 남을 위해 사는 비중이 더 큰 듯합니다.

지금도 7개 정도 봉사단체에 참가하고 있는 정중은 그냥 이름을 걸어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사에 직접 참여합니다, 성격상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구리시 노인정 식사 행사 지원, 고아 장애 아동 자원봉사, 세월호 유족회 행사위원 등등... 정중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적극적으로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두 딸을 둔 정중이는 세월호 사건 이후 수시로 헌혈하기 시작했습니다.

뭔가라도 해야겠다는 애달픈 마음에서입니다. 코로나 기간 중 구리시청에 방문한 정중이는 코로나 대책 회의를 하는 구리시청 공무원들을 보고,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힘이 저런 조직에서 나오는구나 생각하고 놀랐습니다. 정중이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2년 동안 매주 수요일 새벽 삶은 달걀 100, 감자 20kg, 우유 100개를 준비하여 대책 회의를 하는 구리시청 공무원들에게 아침 식사를 직접 트럭에 싣고 가져다주었습니다.

또 재밌는 것은 비록 로또 천 원짜리 한 줄이지만 매주 50장의 로또복권을 구입, 가난한 사람이나 일일 노동자 또는 등산 중 만나는 시민에게 나누어 줍니다. 작은 희망이라도 드리고 싶다는 마음에서입니다. 혹자는 미친 짓이라고 하지만 정중이는 그냥 아무 계산 없이 무조건 합니다. 구리 농수산물시장 중도매인으로 일을 하면서 구리시 아치울 마을에 작은 카페를 열었습니다.

최고의 식재료로 만든 베이커리와 커피, 셀러드가 주메뉴입니다. 그리고 이 공간 역시 동시 동네 주민들을 위한 문화 공간을 만들어, 가난한 청년 작가들을 위한 미술품 전시와 음악공연도 정기적으로 열고 있습니다. 공간이 생기자 마을 어르신들 음식 대접은 더 잦아졌습니다.

2023.2.25.()에는 사회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보호 종료 아동등을 도우려고 카벨 플루트 오케스트라(단장 김남희 플루티스트)와 함께 새봄맞이 사랑의 자선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중이는 중소기업부 소상공인 상, 기업은행의 착한 기업 인상, 착한기업 오뚜기 대표이사의 협력사 방문 등 수없는 상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정중이는 칭찬받는 것에서 끝내지 않았고, 칭찬과 격려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정중이는 24시간 일하며 그 결실로 돈을 벌게 되었지만, 자신의 주머니에는 항상 몇천 원만 가진 나눔의 친구입니다.

정중이는 늘 자신에게 더욱 남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버는 것은 남들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라며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좋은 성공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정중이는 만세맨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네이버 검색에도 만세맨을 치면 나오는 정중이는 언제나 어디서나 만세를 부릅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크게 만세삼창 외칩니다. 그 외침은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해 외치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다들 행복해하고 박수를 보냅니다.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서, 후배 딸 결혼식장에서, 동창회 모임에서, 동네 어르신 모임에서 가족의 만남에서 항상 대한민국과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세삼창을 외칩니다.

이름도 촌스럽게 만세 맨 이지만 정중이는 개의치 않고 사람들의 행복과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11일 새해부터는 집 옆 아차산을 새벽 5시면 오르고 있습니다.

책을 볼 시간을 내기 어려운 정중이는 신문의 사설을 큰 소리로 매일 읽고 녹음하여 지인들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설을 매일 읽으면서 정중이는 1년 후 달라질 자기 모습을 상상합니다.

정중이는 이 사회에 선하고 좋은 영향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내일의 삶을 어제와 다르게,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긍정의 에너지를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는 구리 농수산물 중도매인이자 봉사하는 그런 건강한 사람 정정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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